구름 한 점 없는 깨끗하고 푸른 하늘색으로 가득한 선선한 가을 날씨. 여름이 지나 간지 얼마 되지 않아 여전히 무더움은 조금 남아 있었지만 그래도 한여름 때보다는 서늘한 날씨였다. 학원을 졸업하고 이쪽 업계로 나온 지도 벌써 꽤나 시간이 지났다. 여전히 어려운 부분은 많이 있지만 그래도 시간과 노력이 빛을 발한 걸까. 치아키는 점점 이름을 날리고 유명해졌다. 지금은 중점적으로 배우 일을 하면서 종종 필요할 때 유메노사키 학원의 활동을 높이 사 약간의 음악활동, 스턴트 일 등 다양한 일들을 소화해나갔다. 기본적으로 운동을 해서 체력도 있었고 몸도 조금 잡혀있었기에 앓아눕거나 다치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가끔 생기더라도 스친 찰과상 정도였다. 이런 식으로 일을 해 나가다보니 어느새 톱스타들이 출현하는 드라마나 영화도 찍을 수 있었다. 오늘은 제작팀부터 이름이 알려진 대작의 배역발표 날이었다. 치아키는 당당하게 주역의 자리를 맡았다. 모두가 치아키의 노력을 알고 있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옳다며 축하해주었다. 게다가 오늘은 무척 날도 좋고 일정도 없는 날이었기에 치아키는 축하를 받고 적당히 모자를 눌러쓰고는 집 근처 길거리를 걸어 다녔다.
사람이 많지도 적지도 않은 이 거리에 귀엽고 맛있는 디저트가 있다는 디저트 카페를 찾았다. 치아키는 쓴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에 종종 이렇게 이런 카페들을 찾아 단 음식을 먹거나 달달한 음료를 마셨다. 카페의 이름은 Lit de lapin. 아마 불어인 듯 제대로 이름의 의미까지 알아내지는 못했지만 글자만 보아도 무척 분위기 있는 가게 이름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문에 달린 종이 딸랑하면서 가볍게 울리며 손님이 온 것을 알렸다. 안쪽에는 사람이 몇 명 앉아서 맛있게 디저트를 먹고 있었고 치아키가 주위를 둘러보자 인테리어들이 무척 귀여웠다. 귀여우면서도 너무 유치하지 않은 그런 분위기가 매우 예쁘고 마음에 들었다. 치아키도 자진축하 겸 가게에 들렀으니 카운터로 가서 옆쪽에 나열되어 있는 디저트들을 보고 고르기 시작했다. 어떤 것들도 다 맛있어보였기에 치아키는 가볍게 딸기가 올라가고 생크림이 있는 쇼트 조각 케이크와 카페 라떼를 주문하기 위해 점원에게 말을 걸었다. 한눈에 봐도 눈에 튀는 사람이 파티쉐 복장을 입고 주문을 받았다. 옷에 달려있는 명찰을 보자 타카미네 미도리라는 이름이었다.
"어서오세요, 무엇을 주문하시겠어요?"
"어…저기 있는 딸기 쇼트 조각 케이크와 카페 라떼를 부탁하고 싶습니다만."
"저희 카페라떼는 조금 씁쓸한 편인데 괜찮으신가요?"
"네! 일단 도전해보는 마음으로 마시려 합니다."
"쓴 것을 잘…못 드시나요?"
"부끄럽지만 그렇습니다. 복장을 보니 혹시 이 가게의 파티쉐 이신가요?"
"아…네. 뭐 지금은 사람도 없고…근무하는 직원 분들은 대부분 저녁에 오세요. 일단 준비해드릴테니 잠시 자리에서 기다려주세요."
사장이었구나, 젊네. 아마 자신과 비슷한 또래인 듯 한데 벌써부터 이런 거리에 가게를 내고 경영을 하고 있다는 점이 조금 놀라웠다. 치아키는 자리에 앉기 전에 가게 안을 쭈욱 둘러보았다. 곳곳에 토끼 같은 귀여운 인형들이 올라가져 있었다. 아마 직접 가지고 있던 것을 가져온 것 같은데 귀여운 것을 무척 좋아하는구나 싶었다. 디저트들도 얼핏 보니 들은 소문대로 디자인이 귀여웠고 쇼트케이크도 다른 가게들과 달리 약간씩 포인트가 들어가 있었다. 작지만 동물 모양 딸기 초콜릿으로 데코를 하는 등 세세한 부분에서 신경을 쓴 것이 눈에 보였었다. 벽지도 바닥도 귀여운 물건들과 매치가 적당하지만 분위기 있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며 자리에 앉았다.
가게에 이 정도로 신경을 쓴 것을 보니 아마 꽤 이쪽 분야 일을 좋아하는 듯 했다. 아까 분명 사람이 많지 않다고 했지만 이 가게의 손님은 절대로 적은 편은 아니었다. 그것도 낮이었고 디저트의 종류도 많았다. 학교, 직장인 등 비는 시간마다 사람들이 조금씩 무리를 짓거나 혼자로 찾아오는 경우가 꽤 있었다. 그때마다 혼자 주문을 받고 커피를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웬만한 빠르기로는 그걸 손님들의 불만 없이 해내기는 조금 힘들었다. 그런 부분에서도 열심히 하는구나 싶었다. 아마 좋아하는 일은 열심히 하는 타입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는 동안 받은 진동벨이 울렸다.
진동벨을 들고 가자 접시에 예쁘게 담긴 쇼트케이크와 주문한 카페라떼 그리고 옆에 조그마한 용기에 무언가가 담겨있었다. 치아키가 통을 바라보고 있자 말이 들려왔다.
"이건 시럽이에요. 큰 통에 있던 걸 옮겨 놓은건데 손님 쓴 것을 못 드신다고 하시길래…만약 드시다가 힘드시면 넣으시라고…"
"신경써주시니 무척 감사합니다. 통도 무척 귀엽군요.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맛있게…드세요."
칭찬에 부끄러운 듯 미도리가 몸을 금방 돌리더니 다시 안으로 들어가자 치아키도 자신의 자리로 옮겨서 디저트를 먹기 시작했다. 평대로 정말 맛있었다. 달콤하지만 너무 달지 않아서 입에 물리지도 않고 생크림도 느끼하지 않고 딱 적당한 달콤함이었다. 딸기를 제일 마지막에 먹기 위해 그릇 한쪽에 올려두고는 카페라떼에 손을 뻗었다. 아직 조금 더운 날씨라 아이스로 주문했는데 조금 덜 씁쓸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저번에 단숨에 아메리카노를 시켰다가 한입 마시고 너무 써서 그대로 못 먹고 버린 아까운 사태 이후로 천천히 마셔보기로 결심한 치아키였다.
치아키는 일단 카페라떼를 시럽을 넣지 않은 채 빨대를 꽂아서 한입 쭉 들이켰다. 미도리의 말대로 이쪽 카페라떼는 조금 쓴 편이었다. 아마 디저트가 달콤한 종류가 많다보니 약간 입가심을 위해 단 것보다 쓴 맛을 택한 듯 했다. 치아키는 몇모금 마시다가 미도리가 챙겨준 시럽통에 눈길이 갔다. 분명 오늘은 얼마나 쓰더라도 시럽 없이 다 먹기로 결심했건만. 자꾸 눈길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는 듯 했다. 그래도 이런 것도 못 이겨내면서 앞으로의 일들은 어떻게 버티겠는가! 하면서 속으로 합리화를 시키고는 속도는 느리지만 조금씩 마시기 시작했다. 3분의 1이 줄 무렵 케이크는 이미 없어져버렸고 씁쓸한 맛만이 입안을 가득 메웠다. 이제 어떻게 마실지 고민에 빠진 치아키가 결국 포기하고 시럽통을 들자 옆에 무언가 조그마한 접시가 올라왔고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접시위에 조그만 초코 타르트와 그 옆에 작게 메모가 놓여 있었다. 안에는 조그만 서비스..입니다. 란 짧은 문구와 작은 토끼 이모티콘이 그려져 있었다. 그 메모의 귀여움에 저도 모르게 웃음 터져 나온 치아키가 시럽 통을 내려놓고 타르트를 크게 한입 먹고는 남은 카페라떼를 마셨다. 초코 타르트가 조금 단 편이라 쇼트케이크 때보다는 마시기가 쉬웠다.
초코 타르트도 다 먹을 무렵 카페라떼는 몇 입 마실 정도가 남아있었다. 치아키는 그 때 시럽통을 들어서 조금 들어있는 시럽들을 쭉 짜서 섞어서 마지막 마무리는 비교적 달콤하게 했다. 오늘은 운이 무척 좋은 날인 듯 했다. 매우 만족한 듯 치아키가 짐 안에서 수첩에 펜으로 무언가를 쓰더니 찢고는 그릇을 반납하러 카운터에 갔다. 그리고 그릇을 받는 미도리에게 4분의 1로 접은 종이쪽지를 건네준 후 맛있게 먹었다는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미도리는 갑작스럽게 받은 쪽지에 한동안 치아키가 나간 문을 바라보다가 종이를 펼쳐서 내용을 읽어보았다. 그 안에는 오늘 정말 맛있었다는 말과 옆에 조그맣게 서툴지만 귀여운 곰 모양을 그린 것이 보였다. 미도리는 쪽지를 읽으며 입가에 약간의 미소를 머금었다. 첫 인상도 무척 인상 깊었지만 행동이 무척 마음에 든 미도리였다. 쪽지 안의 그림을 여러 번 바라보던 미도리가 다시 일로 돌아갔다. 마침 직원들과 교대할 시간이라 휴게실로 들어가 교대하고 옷을 갈아입고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날부터 촬영이 시작됐다. 촬영은 무척 순조로웠다. 실수도 거의 하지 않았고 덕분에 일정이 일찍 끝났다. 어제 먹은 디저트 덕인가 할 정도로 컨디션도 좋았고 기분도 상쾌했다. 일찍 끝난 기념 또 들러볼까 하는 마음에 치아키는 다시 또 다른 모자를 쓰고는 미도리의 가게로 향했다. 오늘도 적당한 사람과 쾌적한 분위기의 카페에 컵을 열심히 닦는 미도리가 보였다. 일을 열심히 하는 미도리를 조심히 불러 몇 개의 디저트를 주문했다. 어제 카페라떼 도전에 성공했으니 오늘은 다른 것을 먹자는 의미에서 달달한 것을 주문했다.
"오늘은.. 아이스 초코와.. 저 디저트들 한 개씩 부탁드립니다."
"네, 어…휘핑크림은…올려드릴까요?"
"부탁드리겠습니다!"
크고 명쾌한 목소리로 주문을 하자 미도리가 머뭇거리며 손가락을 꼼질거리더니 조심히 입을 열었다.
"어제…가시기 전에 주신 쪽지 읽었는데 칭찬이랑 그림…감사합니다."
"아뇨, 저야말로 맛있는 디저트들을 맛볼 수 있어서 정말 좋았습니다. 게다가 친절하시기까지 하셔서 덕분에 즐겁게 지내다 갔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준비 할 테니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조금 기다린 치아키가 진동벨이 울려 가지러가자 휘핑크림이 잔뜩 올라가 있고 그 위는 초코 소스가 올라가져 달달해 보이는 아이스 초코가 보였다. 텁텁하지 않은 적당한 단 맛에 디저트를 순식간에 먹은 치아키는 가방에서 대본을 꺼내서 대사를 속으로 천천히 읊어보았다.
일에 너무 열중하면 주위가 보이지 않던 치아키였기에 고개를 들자 벌써 주위가 어둑해져있었고 가게 안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게다가 미도리도 퇴근한 듯 카운터에는 보지 못했던 직원이 보였다. 치아키는 짐을 급하게 챙기고 집에 돌아가서 씻고는 곧바로 잠에 들었다. 아마 대본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눈이 매우 피곤한 듯 몇 번 눈을 깜빡이더니 눈꺼풀이 금새 감겼다.
언제나 미도리의 가게에 들른 다음날의 일들을 순조롭게 풀렸다. 그때마다 치아키의 인상도 좋아졌고 평판도 높아졌다. 그런 점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일정이 빨리 끝나서 자주 그 귀여운 가게에 들러서 맛있는 디저트와 또 착하고 잘생긴 그 사장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치아키는 거의 자주 미도리의 가게에 들러 단골이 되었다. 단골이 되자 미도리도 치아키에게 가끔이지만 몇 번씩 먼저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냥 사소한 날씨 이야기나 그런 정도였지만 치아키에게는 그게 왠지 무척 기분이 좋았다. 치아키는 미도리와 대화를 하다가 갑자기 떠오른 듯 미도리에게 말을 건넸다.
"그러고보니 저는 타카미네씨의 이름을 알고 있는데 제 소개는 하지 않았네요. 저는 모리사와 치아키라고 합니다!"
"모리사와 치아키…?"
치아키는 자신의 입으로 말하고 나서도 순간 아차했다. 모처럼 모자까지 썼는데 혹시나 들키는 것이 아닐까하는 마음에 긴장했다. 딱히 미도리에게는 누구인지 밝혀도 상관없다고 느낀 치아키였지만 지금까지 계속 모자를 써왔고 혹시라도 주위에 관계자나 사람들이 보게 되면 나중에 괜히 미도리 가게의 폐를 끼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최대한 숨기는 것이 좋다고 치아키는 생각했다.
"아…뭔가 이상한가요?"
"아니…그게 아니라 그냥 요즘 나오시는 유명한 분과 이름이 같구나 싶어서…"
"아하하…! 그, 그런 말을 좀 자주 듣는 편입니다."
치아키는 답지 않게 약간 더듬으며 말을 해나갔다. 그리고 미도리를 속이는 방향으로 흘러가버린 것에 대해 조금 죄책감도 들었다. 하지만 이 가게에 기자들이 오는 것은 별로 원치 않았고 그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날이 가면서 미도리는 치아키에게 메뉴에 관한 것까지 물어보기 시작했다. 보통 손님께 이러한 것들을 물어보지는 않지만 치아키는 단골이기도 했고 항상 맛있다고 해주고 또 손님으로서의 의견이 직접적으로 궁금하기도 했다. 미도리에게 치아키의 첫인상은 그냥 평범한 손님일 뿐이었지만 다른 손님들과 다르게 언제나 활발히 인사하는 점이나 쓴 것을 못 먹는다는 말을 들었을 때에는 약간 귀엽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얼굴도 제대로 보여주지 않는 손님이었는데 말투나 행동이 얼굴을 대신하는 듯 했다. 아마 인상이 크게 인식된 계기는 첫날 받은 메모였다. 많은 사람들이 SNS, 말로 칭찬의 말을 해주었지만 치아키의 메모에 적힌 것만큼 기쁜 것은 없었다. 그저 그냥 약간의 시럽을 조금 준비한 것밖에 없는데 그렇게 쪽지 메모까지 건네준 섬세함이 답지 않은 느낌이 들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선도 삐뚤지만 나름 노력한 것이 보이는 곰 모양의 그림에도 그저 웃음이 튀어나왔다. 그 때 이후로 치아키는 자신의 가게에 많이 들렸다. 미도리 입장에서는 꽤 마음에 든 손님이었기에 단골처럼 치아키가 자주 방문하는 것이 좋았고 덕분에 아침과 오후시간에는 거의 치아키를 보기 위해 출근할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치아키도 직장인이었기에 가끔은 바쁜지 오지 못하는 시기도 있었다. 물론 그때마다 한 시기에 집중적으로 더 오는 때도 있었지만 미도리는 규칙적으로 보는 치아키의 모습이 좋았다. 또 언제 발길이 끊길지 몰라 용기를 내어서 몇 번 말도 걸어본 적도 있었다. 그때마다 치아키는 친절하고 또 명랑하게 답을 해주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미도리와 치아키는 대화하는 빈도수도 늘게 되었다.
"음, 타카미네씨는 최근 오래 계시는 것 같은데 피곤하지 않으신가요?"
"아…뭐 딱히 손님들이 붐빌 시간에는 다른 분들이 맡아주시니까 전 만드는 것만 하면 되서 딱히 그런 건…그리고 모리사와…씨? 말도 텄고 저보다 연상이신 것 같은데 말 놓으셔도 괜찮아요."
"갑자기 그러면 폐가 되는게!"
"딱히 폐까지는 아니고…그냥 모리사와씨에게는 도움도 많이 받는 편이니까 앞으로도 얘기할 기회가 더 있다면 이러는 게 더 대화하기 쉽지 않을까 해서…불편하셨다면 넘기시더라도 상관 없어요."
"불편할리가 있나요! 오히려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타카미네…라고 부름 되겠나?"
"네, 모리사와씨."
갑작스러운 미도리의 제안이었지만 대화를 나누고 전부터 미도리가 친근하게 느껴진 치아키로서는 그 제안은 반가운 이야기였다. 게다가 그 이야기를 먼저 꺼내올 줄은 몰랐기에 기쁜 듯 받아들였다. 미도리 자신도 자기 입에서 이런 이야기를 꺼낼 줄은 생각도 못했다. 본래 미도리는 사람들과 크게 소통하지 않는 편이었고 그나마 이야기를 해본 건 치아키가 처음이었다. 얘기를 거듭할수록 치아키랑 대화하는 이 시간들이 소중해져갔다. 그랬기에 먼저 말을 꺼냈다. 아직 많이 대화해보지 못해서 부담스러워 할 수도 있었는데 치아키는 기쁘게 받아들여주었고 말을 놓았다.
말을 놓게 된 이후 미도리와 치아키는 대화하는 빈도수가 늘었다. 미도리가 카페에 머물러 있는 시간이 늘어났고 그 덕에 한산할 즈음에는 치아키 옆에 앉아서 대화하는 경우도 많아졌다. 치아키는 카페에 올 때는 대부분 대본을 들고 왔지만 미도리와 대화할 때에는 이미 다 훑어본 후였고 미도리가 치아키를 바라볼 때에는 그냥 책을 들고 있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기에 치아키의 직업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치아키는 카페 안쪽에서도 좀처럼 모자를 벗지 않았다. 본래 모자를 잘 쓰고 다니지 않는 치아키였지만 현재 치아키는 유명했기 때문에 쓰지 않으면 이런 곳에서 느긋하게 시간을 보낼 수 없었기에 불편하지만 모자를 택했다. 또 사람고 대화할 때는 벗어야한다는 점도 이미 알고 있었지만 벗지 못했고 그런데도 계속 말을 걸어주는 미도리가 고마웠다.
"오늘도 늦게까지 계시네요."
"아, 오늘도 수고가 많구나, 지금까지 계속 일하고 있던건가?"
"으응…메뉴 생각하고 있었어요."
"타카미네는 언제나 일에 열심히구나, 대단하군!"
미도리는 치아키의 칭찬에 부끄러운지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조용히 대답했다. 치아키는 미도리의 색다른 모습을 봐서 기분이 좋은지 평소보다 텐션이 높은 듯 말을 해갔다. 얼마 대화를 나눴을까 가게를 닫을 시간이 되자 대화를 마치고 치아키는 가게에서 나왔다.
처음 미도리를 만났을 때는 가을이 시작 된지 얼마 되지 않은 초가을이었는데 언제 시간이 지났는지 날은 추워지고 크리스마스는 코앞으로 다가왔다. 많은 사람들이 기대에 가득 찬 크리스마스 이브였지만 정작 당일은 눈이 내리려는지 어두웠고 하늘은 먹구름이 가득했다. 역시 이 날씨에는 오지 않으려나. 미도리는 카페 밖을 보면서 생각했다. 평소라면 이미 왔을 시간이 한참 지난 시간이었고 날씨가 날씨이다 보니 어쩔 수 없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다른 손님들도 오늘은 거의 오지 않자 밤에 닫을 예정이었던 카페를 조금 일찍 닫기 위해 정리했다. 내부의 정리가 다 끝나고 바깥의 판넬을 들여오기 위해 문을 열자 미도리 눈앞에는 한 인물이 있었다.
"오셨었네요. 안 오실 줄 알았는데…"
"오늘은 일이 늦게 끝난데다가 하필 우산까지 두고 오는 바람에 도착도 늦어지고 눈 때문에 몸도 젖고 해서 일단 오기는 했지만 돌아갈까 고민하고 있었다."
"많이 젖었다면 일단 안으로 들어오세요. 그 상태로 있으면 감기 걸릴테고…따뜻한 음료라도 한 잔 대접 해 드릴 테니 눈이 멎을 때까지 있으셔도 좋아요."
"오오, 그건 고마운 제안이군. 고맙구나, 타카미네!"
"별로 큰일도 아니고…"
"모자도…젖은 것 같은데 그것도 안쪽에서 말려 드릴까요?"
"아 이건…"
치아키는 젖은 모자를 잡고 조금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미도리로서는 치아키가 왜 그렇게 모자를 벗지 않는지 궁금했지만 저러면 냄새도 날 테고 찝찝한 느낌도 들 텐데. 하지만 불편한 걸 억지로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어렵다면 괜찮다는 말을 꺼내려던 차 치아키는 미도리에게는 더 이상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는지 모자를 벗었고 미도리는 눈에 보이는 익숙한 모습에 약간 눈을 키우고 입을 열었다.
"모리사와 치아키…?"
"아하하…지금까지 조용히 다물고 있어서 미안하구나. 타카미네의 가게에 소란을 일으킬까봐 계속 모자를 쓰고 온건데…타카미네에게는 계속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아서 별로 내키지 않아서 말이지. 지금은 사람도 없고 이제는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아서 말이다."
치아키가 머쓱하게 웃으면서 미도리에게 말했다. 미도리는 처음에는 놀라움이 크긴 했지만 곧바로 마음을 다잡고 대답했다.
"딱히 거짓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모리사와씨의 입장 상 그러지 않으면 안됐잖아요…? 그러니까 더 이상 그런 식으로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요."
"고맙다. 역시 타카미네는 상냥하구나."
"칭찬해도 아무것도 안 나온다구요…일단 들어와요. 날도 추운데 감기 걸리겠어요"
미도리는 전과 전혀 다름없는 반응이었다. 미도리는 치아키가 유명하던 일반 사람이던 상관없었다. 모리사와 치아키는 그냥 모리사와 치아키였다. 그것이 중요했다. 치아키는 미도리의 예상외의 반응에 고마운 듯 밝게 웃으며 미도리를 따라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가게 안은 계속 온도를 높여둔 덕에 들어오기만 해도 따뜻한 기분이 들었다. 미도리는 혼자 있었을 때는 약간 쌀쌀했는데 치아키 한 사람이 가게에 들어온 것만으로도 따스한 느낌이 드는 것이 신기했다. 치아키의 곁은 뭔가 따뜻했다. 체온이 높은 걸까. 옆에만 있어도 따뜻해지는 그 느낌이 매우 좋았다. 포근하게 무언가를 감싸는 듯한 그런 따뜻함이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어제 만들어둔 케이크가 있으니 가져올게요."
"아니, 그렇게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다. 그냥 들어오게만 해준 것도 고마운데 거기까지…!"
"그냥 제가 먹고 싶은 것 뿐 이니까…금방 가지고 올게요."
미도리는 어제 만들어둔 케이크를 꺼내서 예쁜 그릇에 담아 치아키에게 가져왔다. 치아키는 보자마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생크림이 듬뿍 들어있는 롤과 겉은 초코크림을 사용하고 통나무 모양을 낸 케이크였다. 그 위에는 조그마한 설탕으로 만든 산타와 사슴모양의 인형과 작게 만들어진 크리스마스 원형리스로 장식되어 있었다. 게다가 위에 슈가 파우더로 하얗게 올린 덕에 꼭 지금의 눈이 온 것 같은 케이크처럼 보였다. 치아키가 케이크를 열심히 바라보는 동안 음료를 만들어온 미도리가 치아키에게 작은 마시멜로가 동동 떠있는 핫초코를 건넸다.
"케이크도 단 음식이지만…다크 초콜릿이기도 하고…춥기도 하고…이쪽이 더 좋을 것 같아서."
"음! 아주 맛있어 보이는 핫초코구나. 감사히 잘 먹겠다. 이 케이크도 무척 맛있을 것 같은데 이렇게 예쁘고 맛있는 디저트를 만들 수 있다니 타카미네는 정말 실력이 뛰어나군!"
"딱히 그리 어려운 디저트가 아니니까…"입맛에 맞으면 좋겠네요."
"타카미네가 만든 디저트다. 맛있을게 분명하다고 장담할 수 있지. 그리고 여기 산타와 사슴이 있는데 이건 혹시 크리스마스 케이크인가?"
"아…맞아요. 부쉬 드 노엘이라고…크리스마스 이브에 먹는 통나무 모양의 프랑스 전통 케이크에요. 오늘 이브이기도 하고…기왕 먹을거면 이걸 먹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기념적인 케이크로군! 무척 먹음직스러워 보이니 괜찮다면 한 조각 부탁해도 괜찮겠나?"
"여기 있어요. 맛있게 드세요…"
치아키는 미도리가 담아준 케이크를 포크로 알맞게 잘라서 입에 넣었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롤이 생크림과 크림이 섞여 무척 맛있었다. 같이 먹은 핫초코도 차갑게 얼은 몸을 녹여주듯 몸을 아주 따뜻하게 만들어주었다.
"정말 맛있구나, 몇 조각이라도 먹을 수 있을 정도다."
"입맛에 맞는다니 다행이에요."
"타카미네도 옆에서 같이 한 조각 어떤가?"
"저는 괜찮아요. 이미 저녁 먹었고…"
"음…그런가. 그래도 이렇게 맛있게 만들어진 케이크를 혼자 먹는 것도 아쉬우니까 그렇다면 이건 어떤가! 타카미네 입을 벌려라!"
"네? 갑자기 왜 입을…"
"한 조각이 부담스럽다면 이 한입은 어떤가? 자 아~ 하는 거다!"
"윽…부끄러우니까 그건 그만둬주세요. 먹을테니까요."
미도리는 갑자기 입 앞에 들이밀어진 케이크를 잠시 고민하는 듯 하더니 입을 벌리고 먹었다. 우물거리다가 삼키고는 작게 맛있네…라고 중얼거리자 치아키가 역시 그렇지? 라는 말을 했다. 작게 중얼거리는 말을 듣고 대답을 하다니 역시 귀가 밝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끝났다고 생각한 치아키의 아~ 공세는 끝나지 않았다. 미도리가 한입 먹을 때마다 또 다시 한입 크기로 잘라서 미도리에게 주었다. 거절할 수도 없이 미도리는 한 조각을 다 먹을 때까지 치아키가 주는 케이크를 받아먹었다. 치아키는 그 모습이 좋았는지 기분 좋게 웃으면서 미도리를 바라보았다. 치아키의 그런 얼굴을 볼 때마다 얼굴이 붉어진 미도리는 눈 둘 곳을 잃은 채 자신이 쥔 컵을 만지작거렸다.
"눈, 더 많이 오네."
"아…그러게요. 얼른 그쳐야 할텐데…"
"나는 눈이 그치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만."
"눈이 그쳐야 돌아갈 수 있지 않아요?"
"그렇지만 눈이 그치면 지금 타카미네랑 있는 이 시간이 금방 끝나버리니까, 그건 조금 싫은걸."
미도리는 꽤 놀랐다. 치아키가 저런 말을 할 줄은 상상도 못했기 때문에 약간 벙찐 표정으로 치아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속으로 확신했다. 자신은 눈앞의 이 사람을 좋아한다는 것을. 그리고 조심스레 손을 뻗어서 치아키의 약간 젖은 머리칼을 부드럽게 만졌다. 갑작스럽게 느껴진 손길에 치아키가 놀란 듯 힉 하는 소리를 내자 미도리도 순간 움찔거렸지만 곧 다시 계속해서 만졌다. 치아키도 기분이 나쁘지 않은지 미도리의 손길에 말없이 가만히 앉아있었다. 미도리는 머리칼을 만지다가 저도 모르게 조용히 말을 뱉었다.
"좋아해요…치아키씨."
자신이 말하고도 놀란 미도리가 깜짝 놀란 듯 급하게 손을 뗐다. 그리고 혹시 치아키가 불쾌하게 받아들였을까 걱정이 된 미도리는 치아키에게 미안하다고 말을 꺼내려고 했으나 하지 못했다. 치아키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손등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예상외의 반응에 놀란 건 미도리도 마찬가지였다. 이 수습하지 못할 분위기에 미도리 쪽에서 먼저 입을 열었다.
"모리사와씨…?"
"그, 그게 이건 말이다…너무 더워서 그런 것 같다. 가게 안은 따뜻하니까 말이다!"
"아…더우면 온도 내려드릴까요?"
치아키는 미도리의 행동에도 곧바로 반응했다. 손을 뻗으면 깜짝 놀란다거나 눈을 맞추려하면 애매하게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미도리는 말실수를 한 거라고 생각이 들어 조금 우울한 목소리로 치아키에게 사과했다.
"모리사와씨…방금 이야기 기분 나빴다면 그냥 넘기셔도 돼요. 그냥 잘못 말한거라고 생각하고."
"아니다, 기분 나쁜게 아니라!"
"그럼 왜 제 시선을 피하세요?"
"그건…"
"거봐요. 역시 대답 못하고…"
"그게 아니라 타카미네의 말이 기뻐서…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잘 몰라서…그래서 그런 행동을 취하게 되어버렸는데 상처가 되었다면 미안하구나. 나도 타카미네가 정말…좋다."
모리사와씨가, 나를? 미도리는 우울했던 기분은 온데간데없이 그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갑자기 말해버린 본심이었지만 당연히 거절당할 거란 생각밖에 하지 않았는데. 상호였다는 말에 미도리는 기쁨과 동시에 놀라움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전부터 좋아했는데…타카미네는 인기도 많을 것 같고 나는 남자다보니 기회는 없을거라 생각해서 말을 못했는데 먼저 말을 꺼내니까 무척 기쁘구나…"
"저야말로…계속 좋아했는데 남자고…크고…별로 귀엽지도 않고 무슨 자신으로 고백을 하나 싶어서…"
"그렇지 않다. 타카미네는 세상에서 제일 귀여우니까!"
마음을 확인하자마자 곧바로 치고 들어오는 치아키의 말에 미도리는 고장이라도 난 듯 붉어지는 얼굴을 제어하지 못했다. 어째서 저 사람은 저런 말도 금방 해버리는지. 그래도 기분이 좋았다. 아마 오늘이 아니었다면 전하지도 못한 채 마음에 그저 묻어가기만 했을 마음이었다. 무의식에서 시작되었지만 덕분에 마음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었다. 부끄러워하는 미도리가 정말로 귀여운 듯 이번에는 치아키가 손을 뻗어서 미도리의 뺨을 쓰다듬었다. 치아키의 따뜻하지만 오늘은 조금 차가운 손길이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약간 숙인 고개를 들자 치아키가 사랑스럽다는 표정으로 미도리에게 말했다.
"정말 사랑한다, 타카미네. 항상 즐겁게 만들어줘서 정말 감사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괜찮다면 앞으로도 옆에서 계속 맛있는 디저트들을 만들어주겠나?"
"내가 아니라 디저트가 목적인건 아니에요?"
"그럴리가 있나! 나는 타카미네와 타카미네가 만들어주는 디저트가 세상에서 제일 좋으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쳐둘게요. 저도 모리사와씨…좋아하니까."
치아키의 고백에 미도리가 드물게 약간의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밖은 춥지만 안은 따뜻한 공기로 가득 차 서로의 마음을 녹여주었다. 치아키가 미도리의 말에 웃어주더니 입을 열었다.
"고맙다 타카미네. 혹시 괜찮다면 부탁 하나 할 수 있을까?"
"뭔데요?"
"앞으로는 방금처럼 불러주지 않겠나?"
"방금…이라면 어떤…?"
"이름으로…불러주는 것 말이다!"
분명 무의식 상태에서 말한 것 이다보니 까맣게 잊고 있었다. 정말 갑작스러웠지만 그때 분명 자신은 치아키씨 라고 했다. 곧바로 정신이 들어 성으로 바꿔 말했지만 치아키가 저것을 요구할 줄은 몰랐다. 미도리는 잠시 곰곰히 고민하는 듯 하더니 치아키를 바라보고는 입을 열었다.
"그럼 그렇게 부를테니 치아키씨도 저를 이름으로 불러주세요."
"갑자기 말인가?"
"치아키씨의 부탁도 충분히 갑작스럽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죠…저만 이름으로 부르는 건 뭔가 불공평하잖아요?"
"그건…그렇군. 그럼 미도리…라고 부르면 되겠나?"
"응, 좋아요."
미도리라고 치아키의 입에서 나온 자신의 이름이 오늘만큼 만족스러운 날도 없었다. 치아키의 입에서 직접 목소리로 들으니 지금까지 친구들이나 부모, 형제들에게 들었을 때보다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이 몰려왔다. 미도리는 치아키를 꼭 껴안더니 치아키의 이름을 지그시 불렀다.
"치아키씨…"
"왜 그러나, 미도리?"
"앞으로 계속…제 옆에서 오래 남으면서 저랑 제 디저트…좋아해주세요."
"물론이지. 절대 떨어지지 않을테니 걱정마라."
치아키의 말에 안심한 듯 미도리는 그대로 치아키를 꼭 껴안고 있었다. 치아키는 저항도 하지 않은 채 자신을 껴안는 미도리를 손으로 부드럽게 만졌다. 밖에서 내리는 눈은 그칠 새를 보이지 않았다. 시간은 자정을 넘겨 이미 하루가 지났고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아직 끝나지 않은 채 오래 지속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