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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빗물이 뚝뚝 떨어져내리는 날이면 치아키는 종종 열병을 앓곤 했다.

 

출근 시간을 코앞에 두고도 아파하는 아들의 손을 꼭 잡아주는 다정한 부모님 아래서 자랐다. 그래서 치아키는 자신을 걱정하는 부모님을 위해 거짓말을 배웠다. 혼자 있어도 괜찮으니 어서 가보세요. 어릴 적에 처음 배운 거짓말이었다.

 

 그 열병을 이겨내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면 언제나 새하얀 케이크를 먹을 수 있었다. 하루는 청포도, 하루는 오렌지, 하루는 딸기. 크림 위에 올라간 과일은 그때 그때 달랐지만 꼭 케이크를 다 먹은 뒤에야 마지막 과일을 먹는 습관이 생겼다. 언젠가 먹었던 딸기의 맛이 시큼했던 기억이 난다.

 

 580엔이라는 숫자가 그렇게 커보일 수가 없었다. 주머니에 들어 있는 동전을 다 꺼내 모아봐도 고작 100엔 남짓 되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치아키는 부모님에게 간식을 사달라 조르는 아이도 아니었다. 한바탕 거하게 앓고 받은 케이크 한 조각이 유난히 특별했던 이유다.

 

 마음에 드는 대본을 골라 작품을 하고 모든 행보가 기사화되는 스물여덟 살의 어느 겨울. 홀케이크 수십개를 사도 아쉽지 않을 돈을 쥐고 치아키는 가게 안 쇼케이스 너머가 작은 과자 왕국처럼 보였던 시절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

 

 “치아키 씨.”

 

 “응…….”

 

 “오늘 촬영 있다고 했잖아요.”

 

 “조금만…….”

 

 그 조금만이 몇 분째인지는 알고 저러는 걸까? 미도리는 침대 옆에 쪼그려 앉아 베개에 얼굴을 박은 치아키를 보며 뚱하게 생각했다. 자다 눌린 머리칼을 손으로 쓸어주고 한번 더 조곤조곤 타일러본다. 일어나요.

 

 “타카미네…….”

 

 “일어날 마음이 좀 들어요?”

 

 “아파…….”

 

 “네?”

 

 치아키가 들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파. 아파. 어머니. 아파요. 아버지……. 아프다는 말에 미도리는 베개에 처박힌 치아키의 얼굴을 돌려 이마에 손을 올렸다. 아무리 열이 많은 사람이라지만 이건 도를 넘은 열이었다. 이미 볼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치아키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어제, 치아키가 영하로 떨어진 날씨에서 몇 시간 동안이나 촬영을 하고 느지막이 귀가했다는 걸 그제야 떠올렸다.

 

 일단 급하게 가져온 물을 먹이고 집에 있는 서랍이란 서랍을 다 열어 겨우 찾은 체온계로 열을 쟀다. 삐빅. 곧 숫자를 띄운 디지털 화면에 대고 미도리는 침음을 흘렸다.

 

 “39.6도? 이러다 죽는 거 아냐……?”

 

 미도리는 잔병치레가 드문 편이었다. 가게 일을 도우면서 체력이 붙기도 했고 매일 반찬으로 끊임없이 야채를 먹으니 그 흔한 감기도 미도리와는 그다지 연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감기에 걸린 게 언제였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붉은 눈가에 송골송골 맺힌 눈물을 닦아준 미도리가 치아키의 이마에 해열 시트를 붙여주었다. 땀에 젖어 머리카락이 약간 뭉쳐 있었다.

 

 치아키가 약발이 잘 받는다는 건 유성대 시절 직접 약을 먹여본 미도리가 제일 잘 아는 사실이었다. 이번에도 서랍을 죄 열어 찾아낸 해열제를 들고 한숨을 쉬고 만다. 앞에 있는 게 연인인지 어머니인지도 구분 못할 만큼 열에 시달리는 사람이 스스로 약을 먹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주 잠깐 망설이다가 손톱 반절 크기의 약을 제 입에 넣고 물을 삼킨 미도리가 치아키 위에 올라타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입술이 거칠었다. 물을 먹인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그새 수분이 말라 까칠한 느낌이 났다. 입술에서부터 전해지는 비정상적인 온기가 심기를 거슬렀다. 미도리는 치아키의 뒷목을 쥐어 고개를 틀었다. 입안에 약을 밀어넣어 목울대가 움직이는 걸 확인하고는 침대가 흔들리지 않도록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아무리 보기만 해도 사랑스럽고 마음이 동하는 연인이라지만 아픈 사람을 상대로 키스 따위를 할 정도로 욕구 불만은 아니었다.

 

입에 짧게 버드키스를 해주고 나서 침대에서 내려온 미도리가 붉은색 폰케이스가 씌워진 핸드폰을 들었다. 치아키의 핸드폰이었다.

 

「오늘 치아키 씨 아파요.」

 

 문자를 보내자마자 시끄러운 벨소리가 방을 뎅뎅 울렸다. 기껏 약을 먹이고 재워놓은 환자의 미간에 깊게 주름이 패였다. 아, 매니저 형! 미도리는 바로 벨소리를 꺼버리고 치아키를 토닥였다.

 

 “쉬이…… 자도 돼요. 더 자요. 안 일어나도 돼요.”

 

 “응…….”

 

 다행스럽게도 치아키는 두어 번 뒤척이나 싶더니 찡그렸던 눈가를 예쁘게 폈다. 착하죠……. 작게 속삭이는 미성이 열 오른 귓가를 간지럽게 쓰다듬었다. 옳지. 착하다……. 이마를 맞대고 조곤조곤 칭찬했다. 미도리는 이런 다정한 속살거림이 치아키에게 제법 먹히는 방법이라는 걸 그간의 동거 생활로 체득한 사람이었다. 외동으로 자란 치아키는 부모님을 제외한 타인이 자신을 챙겨 주는 것에 익숙하지 않음과 동시에 아닌 척하면서도 그 보살핌을 상당히 좋아했다.

 

 “……잘 자요.”

 

 쪽. 아까처럼 입에 키스를 했다. 미도리는 소리가 나지 않게 살살 방문을 닫고 나와 부재중 9건이 찍힌 핸드폰 화면을 톡톡 두드렸다.

 

 [치아키 씨 아파?!]

 

 “깜짝이야. 소리 좀 줄여요. 아까 형 때문에 치아키 씨 깼단 말이에요.”

 

 [아, 어, 미안…… 아니, 그래서. 왜? 어디가 아픈 건데? 병원 가야 돼?]

 

 “몸살이에요. 어제 추운 데서 그렇게 무리했으니까…… 치아키 씨, 의외로 잔병치레 잦은 타입이고.”

 

 [그래…… 그러네. 그러게 어제 그냥 이쯤에서 접자니까 바득바득 우겨서 마지막까지 촬영했거든. 몸살로 끝나서 다행이다. 지금 집이야?]

 

 “네. 해열제 먹였어요.”

 

 찬장과 냉장고를 뒤져보니 레토르트 죽과 먹다 남은 유자차 병이 나왔다. 죽을 들고 잠시 고민하던 미도리가 죽을 도로 찬장에 넣고 핸드폰을 고쳐 들었다.

 

 [뭐, 먹일 건 있고?]

 

 “방금 죽 찾았는데…… 역시 즉석식품은 좀. 야채죽 만들어 주려고요.”

 

 [치아키 씨 덕에 아주 죽 장인 되겠어. 뭐라도 사갈까?]

 

 “됐어요. 괜히 치아키 씨 깨기라도 하면 안 되고. ……빗소리 들리는데. 밖에 비 와요?”

 

 미도리는 유통기한을 확인하던 유자차 병을 들고 느리게 거실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아침인데도 바깥이 어둡다고 생각했는데. 이른 아침부터 비가 내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집 앞에 보이는 놀이터 미끄럼틀에 물 웅덩이가 고여 있었다.

 

 [아. 오늘 전국에 비 온대. 갑작스런 비라더라. 그래서 어차피 촬영도 취소됐어. 이왕 오프 된 김에 치아키 씨 잘 재우고 푹 쉬게 해줘. 타카미네 너도 쉬고.]

 

 9월 18일. 마침 치아키의 생일까지다. 내년이니까 한참 남았네. 병을 내려놓고 냉장고에서 당근과 시금치를 꺼낸 미도리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대꾸했다.

 

 “환자 간호하면서 쉬긴 힘들거든요.”

 

 [말이 그런 거지. 그럼 끊는다!]

 

 “네. 형도 쉬세요.”

 

 순식간에 적막이 흘렀다. 어디 보자……. 방문이 제대로 닫혔는지 확인하고, 미도리는 핸드폰 음악 리스트 하나를 골라 작은 음량으로 틀었다. 나름의 노동요인 셈이다. 꺼내둔 당근과 시금치를 도마 위에 올리며 익숙하게 집 안을 채우는 멜로디를 따라 흥얼거렸다. 죽이랑, 유자차랑, 사과맛 사탕이랑…….

 

 “불러줘, 달려갈 테니까…….”

 

 정작 그 노래를 부른 당사자를 골골대는 몸 상태로 침대와 한몸이 된 참이었지만. 당근 껍질을 벗기는 소리가 힘찬 노랫소리에 슬쩍 묻혔다.

 

*

 

 “물…….”

 

 뻑뻑한 눈을 억지로 뜨니 열감이 확 몰려왔다. 눈꼬리에 매달려 있던 눈물이 도르륵 떨어졌다. 머리가 지끈지끈 울린다. 아파. 무의식적으로 중얼댔다.

 

 “물 마실래요?”

 

 “타카미네…….”

 

 미도리가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목에 앞치마 리본이 묶여 있었다. 아플 때 봐도 잘생겼구나…….

 

 “일어나자마자 실없는 소리 하지 말구요. 일어날 수 있겠어요?”

 

 “음…… 일어날 수 있다…….”

 

 치아키의 등을 받쳐 침대 헤드에 기대게 해준 미도리가 미지근한 물을 건넸다. 물로 목을 축인 치아키의 몸이 축 늘어졌다.

 

 “살 것 같다…… 얼마나 누워 있었지?”

 

 “반나절 정도요. 세 시쯤 됐어요. 열 한번만 더 재봐요.”

 

 삐빅. 아까와 같은 음을 내고 화면에 표시된 숫자는 38도였다. 떨어진 열만큼 활기를 찾은 치아키가 해실거렸다.

 

 “간호해 준 건가, 타카미네?”

 

 “치아키 씨, 약발은 잘 들으니까…… 놔두면 죽을 것 같았고…….”

 

 하하, 죽진 않는다만! 미도리는 그 말에도 괜히 툴툴댔다. 다음엔 진짜 안 챙겨줄까 보다. 매고 있던 앞치마를 벗어 곱게 개켜놓은 미도리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죽 그릇이 놓인 쟁반을 치아키에게 내밀었다. 마침 막 완성해 가져온 참이었다. 치아키는 쟁반을 받아들고 멀뚱멀뚱 미도리를 응시했다.

 

 “……그렇게 쳐다봐도 안 먹여줄 거예요.”

 

 “아니…… 혼자 먹을 수 있다! 그게 아니라…… 점점 죽 종류가 다양해지는 느낌이구나!”

 

 “누구 탓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당신…….”

 

 처음에는 묽은 흰 죽. 그 다음에는 계란죽. 소고기죽. 시금치죽. 이번에는 야채죽. 참 많이도 아팠다. 치아키의 이마를 검지로 꾹 밀어냈다. 아야야. 작게 웃은 치아키가 수저를 들고 죽을 크게 떠 후후 불었다.

 

 “맛있어! 죽 장사를 해도 되겠는걸?”

 

 “제 본업이 뭔지는 아는 거죠?”

 

 “물론이다! 어차피 타카미네의 죽은 나 혼자만 먹고 싶으니까 말이지!”

 

 “항상 생각하는 건데, 못하는 말이 없네요, 치아키 씨…….”

 

 “그게 내 장점이잖나?”

 

 당당하게 대답하고는 적당히 식힌 죽을 또 한 입. 열이 완전히 떨어진 게 아니라 머리가 울릴 만도 한데 치아키는 군말없이 잘도 먹었다. 미도리는 잠시 그런 치아키를 보고 있다가 거실로 나가 유자차를 들고 왔다.

 

 “다 먹고 나면 이거 마셔요. 저는 잠깐 나갔다 올게요.”

 

 “응? 어디 가는 거지? 같이 가자!”

 

 “환자는 얌전히 누워 있어 주세요. 움직이다가 쓰러지면 그야말로 대형사고라구요.”

 

 정말로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치아키의 어깨를 꾹 눌러 앉혔다. 의문이 한가득 담긴 눈을 뒤로 하고 미도리는 꺼내 둔 갈색 코트를 걸쳤다. 핸드폰과 지갑을 주머니에 넣고는 결국 치아키에게서 수저를 빼앗아 호호 불어 한 입 먹여주고 말을 꺼냈다.

 

 “협탁에, 여기요. 해열제 놔뒀어요. 이것도 먹고 한숨 푹 자요. 그러고 나면 열 다 떨어질 테니까.”

 

 “오래 걸리나?”

 

 “아뇨. 30분이면 돼요. 저 없어도 괜찮죠?”

 

 “그래! 걱정 말고 다녀와라, 타카미네! 집은 이 정의의 히어로가 지키마!”

 

 “집이 히어로를 지켜줘야 할 판인데요…… 다녀올게요. 약 꼭 먹어요.”

 

 말은 그렇게 해놓고 이마에 다정히 입을 맞춰준 미도리가 웃었다. 어느덧 습관 마냥 굳어진 것이었다. 이마에 키스하고 눈을 마주하며 웃는. 치아키가 가장 좋아하는 타카미네 미도리의 습관이다. 하기사 좋아하지 않는 것이 어디 있겠냐마는.

 

 초록색 우산을 챙겨 집을 나섰다. 찰박거리는 발걸음이 거실에서 보았던 물 웅덩이 고인 놀이터를 지난다. 어렸을 때부터, 앓고 나면 케이크를 사주고는 했어요. 불과 한 시간쯤 전에 한 통화 내용을 상기하며 미도리는 단내가 진동하는 케이크 가게의 문을 밀었다.

 

 딸랑.

 

*

 

 저녁 즈음엔 비가 그쳤다. 돌아오면서 산 바닐라 라떼를 홀짝이면서 미도리가 채널을 돌렸다. 볼 프로그램이 없어 아무렇게나 눌렀더니 우연찮게도 치아키가 주연을 맡았던 드라마가 나와 리모컨을 내려놓았다.

 

 별 박힌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눈을 감는다. 자? 아니. 졸려? 안 졸려. 눕고 싶어? 아니라니까. 왜 그래? 그럼 슬쩍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맞추더니 슬 웃는다. 있지. 나는 졸리니까 뽀뽀해주라! 뭐야, 그게. 푸하하, 웃음소리 두 개가 고요한 밤을 흔든다. 그러고 나선 자연스레 손을 뻗는다. 이리 와. 응.

 

 “타카미…… 으악, 왜 그걸 보고 있나!”

 

 “아, 선배. 깼어요? 이제 일어날 수 있어요?”

 

 “그게 문제가 아니라! 채널, 채널 돌리자! 리모컨 어디 있지?”

 

 “자요. 팔팔하네요.”

 

 “방금까지는 잠이 덜 깬 상태였는데…… 정신이 번쩍 드는구나! 하필 그 장면이라니…….”

 

 따뜻한 라떼를 가득 머금었다가 삼켰다. 바닐라 시럽 향. 코끝에 잔향이 남았다. 미도리는 아직도 소파 옆에 서서 마른세수만 연신 하고 있는 치아키의 눈앞에 박스를 들이밀었다. 치아키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붉은 기 없는 낯이다.

 

 “이건 뭐지?”

 

 “열어보면 알겠죠?”

 

 “여는 순간 터지는 폭탄이라든가…….”
 

 “아무래도 영화 그만 찍어야 할 것 같아요, 치아키 씨는.”

 

 “농담이다!”

 

 언뜻 봐도 케이크 박스다. 다만 이걸 주는 의미를 모르겠다는 뜻이었다. 치아키는 예상대로 박스 안에서 나온 조각 케이크를 보고 고개만 갸웃거렸다.

 

 “아까 말이에요.”

 

 라떼를 반쯤 마시고 미도리가 문득 입을 열었다.

 

 “전화가 왔는데…… 치아키 씨네 어머니께서. 치아키 씨는 앓고 나면 케이크를 먹는다고.”

 

 “어…….”

 

 “근데 벌써 몇 번이나 못 먹었네요, 케이크. 미안해요.”

 

 딸기가 가지런히 올려진 새하얀 케이크와 언제 봐도 사랑스러운 연인의 얼굴을 번갈아본다. 치아키는 뒤늦게 거실 창문에 빗자국이 남아 있다는 걸 눈치챘다. 비 오는 날, 그 전화 한 통에 굳이 케이크를 사러 다녀와 준 사람.

 

 치아키는 케이크를 테이블에 올려놓고 포크 두 개를 챙겨 돌아왔다. 바닥에 앉아 씩 웃으며 포크 하나를 미도리의 손에 쥐여주는 모습이 생일선물을 받은 어린애 못지 않게 천진했다.

 

 “먹어봐야지!”

 

 올려진 딸기가 떨어지지 않도록 살살 잘랐다. 치아키는 미도리도 케이크를 자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동시에 포크를 물었다. 입안에 확 퍼지는 달달한 생크림과 부드러운 스펀지 시트가 생각보다 더 맛있었다. 미도리도 눈만 깜박이다 라떼 컵을 쥐었다.

 

 “유명하다고 해서 사와봤는데 확실히 맛있네.”

 

 “음! 너무 달지 않아서 좋다!”

 

 “도박일까 봐 일부러 한 조각만 사왔거든요. 다음에는 홀케이크로 예약할게요.”

 

 “또 아프라고?”

 

 “치아키 씨라면 아마 한 달 내로?”

 

 눈을 가늘게 뜨고 보던 치아키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럴지도 모르지! 부정은 하지 않았다.

 

 아슬아슬하게 남은 케이크 조각 위에 아직 딸기가 덩그러니 장식되어 있었다. 치아키는 딸기를 콕 찍어 미도리의 입에 가져다 댔다.

 

 “이건 타카미네 거!”

 

 “치아키 씨 주려고 사온 건데 이게 왜 제 거예요?”

 

 “오늘 고생했다고 주는 상이다!”

 

 “야채죽과 케이크의 대가가 딸기라니, 좀…….”

 

 “이 녀석! 케이크 위에 올라간 딸기는 엄청 특별한 거라고?”

 

 “그거야 알고 있지만 말임다…….”

 

 눈동자를 데록데록 굴리던 미도리가 생크림이 묻은 딸기를 받아먹었다. 입을 움직일 생각은 않고 가만히 치아키만 바라보다가 충동적으로 입술을 부딪힌다. 치아키가 들고 있던 포크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귀를 자극했다. 긴 키스는 아니었다. 금세 떨어져 라떼로 목을 축인 미도리와 달리 치아키는 테이블에 얼굴을 파묻고 끙끙거렸다.

 

 “반칙이다…….”

 

 “딸기 시죠?”

 

 “응…….”

 

 “그럴 것 같아서 준 거예요.”

 

 턱을 괴고 얄궃게 웃었다. 치아키는 불퉁하게 입을 내밀고 접시에 잔해처럼 흩어진 케이크 조각을 하나둘 먹어치웠다.

 

 “게다가 커피 맛이 났다.”

 

 “커피요? 아…… 라떼.”

 

 컵을 내려다본 미도리가 남은 라떼를 홀짝였다. 시럽이 세 펌프나 들어갔는데도 치아키의 입맛에는 썼던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선배 향이 나서 좋아하는데.”

 

 “내 향?”

 

 “바닐라.”

 

 텅 빈 컵을 접시 옆에 두고 무릎을 끌어모아 그 위에 턱을 괸다. 미도리의 예쁜 짓을 보며 치아키는 어쩔 수 없이 키득거렸다. 켜놓고서 잊은 예능 프로그램에서 정신 사납게 떠드는 소리가 배경음으로 깔렸다.

 

 “다음엔 홀케이크라고 약속한 거지?”

 

 “네. 그때도 딸기로 사올까요?”

 

 “오우! 이번 딸기도 셨으니까 다음 번엔 반드시 달콤한 딸기였으면 좋겠구나!”

 

 이번. 미도리의 의문은 짧게 지나갔다. 잔잔히 웃음을 흘리면서 미도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치아키 씨가 아프지는 않았으면 좋겠지만요.”

 

 “그럼 크리스마스 케이크로?”

 

 “아. 그거 좋다.”

 

*

 

 토독토독. 한바탕 열병을 앓은 후에 듣는 가느다란 빗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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